[틀:다른 뜻2]

[틀:역사/시대구분]


목차

1. 개요
2. 시대별 구분
3. 구석기 시대
3.1. 중석기 시대
4. 신석기 시대
5.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6. 황하 유역의 신석기 문화 전개 양상
7. 보드게임의 한 종류
7.1. 참고
8. 대중매체에서
9. 기타

1. 개요

石器時代

인간을 주요한 도구로 사용한 시대. 보통 돌로 만든 도구의 수준에 따라서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이 시기는 인간의 문명이 미약했던 시기이고,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이라는 뜻의 선사 시대(先史時代, Prehistory) 대부분 시대를 차지하는 시기기도 하다.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동기 시대라는 중간기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비교적 짧은 시기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사회를 철기 시대를 넘어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실리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시대별 구분

3. 구석기 시대

舊石器時代 / Paleolithic (Period)[1]

인간이 살았던 시기를 100으로 본다면 구석기 시대는 98.8 정도를 차지하는 매우 긴 시기이다.[2] 지질학적인 기준으로는 플라이스토세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옛 석기 시대. 인류 최초의 시대 구분으로, 선사 시대 중 처음을 장식하는 시대이다. 인류학적 분류로 보면 아프리카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가장 먼저 구석기를 사용했다. 현재로서는 인류와 다른 동물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시대로,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들은 많으나 아직까지 인류 외에는 '돌을 깨서 도구를 만든다'라는 개념까지 도달한 동물은 카푸친 원숭이밖에 없다.[3] 그래서 카푸친 원숭이는 최소 700년 전부터 돌을 깨서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하며 그래서 인간 외에 석기시대에 진입한 유일한 동물로 본다.[4]

이 시대에 사용된 석기는 뗀석기(= 타제석기, 打製石器)[5]를 사용하였으며, 전문가가 아니면 이것이 그냥 돌인지 석기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전문가는 타격법과 가압법을 통해 가공의 여부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한다. 뗀석기한테 관심법이라도 쓰는 건가 예를 들어 긁개의 경우엔 그 유형을 59개로 분류하기도 한다. 전기 구석기일수록 돌을 좌우로 나누었을 때 그 대칭이 명확한 편이다.



유튜브 뗀석기 만드는 법. 9:20 구간에 보면 진짜 돌칼이 만들어진다.

"뗀석기에는 행위에 의식과 목적이 있다"[6]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4: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7]


좌우 대칭의 개념이 생겼으며, 적극적으로 도구에 적용시킨 시대이다. 이 좌우 대칭 개념은 다음 시대로 넘어가 신석기 시대의 간석기 → 청동기 시대의 동검 → 철기 시대의 철검으로 계승되며, 현대인이 사용하는 도구에도 이 개념이 녹아있다.


보통 구석기 시대 돌도끼를 상상하면 나무에 묶은 돌을 연상하는데, 사실 나무라는 손잡이가 달린 경우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가서야 등장한다. 전기 구석기 시대는 돌 하나가 맥가이버칼처럼 전천후 기능을 가진 것이 많았으나,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석기 하나당 1~2가지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 가장 오래된 석기군은 올도완 석기.

석기 시대이기 때문에 이름처럼 석기를 주로 이용하였지만, 뼈와 같이 단단한 물질도 제법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나 부수면 날카롭게 갈라지는 흑요석은 주요한 무기 자원으로 거래도 되었다고 한다.[8] 이 흑요석은 산출지가 한정되어 있고 성분에 따라 산출지를 쉽게 특정할 수 있는데, 산출지 주변 뿐 아니라 오늘날의 국경을 넘어 먼 지역에서도 흑요석 석기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에도 오늘날의 국제교역 같은 장거리 지역 간 이동이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석기의 용도는 일반적으로 사냥이나 전쟁을 위한 무기나, 고기나 곡물 등 식량이나, 가죽 옷감의 가공을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지만, 실제 구석기 유물을 현미경 등으로 조사해보면 의외로 마모흔 등 많이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그 당시 석기는 일상에 널리 쓰기에는 상당한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석기가 권위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장식용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청동기 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위 사진의 돌칼도 그 형태가 실용적 목적보다는 장식용이다. 청동기도 실제 생활 도구로서 보다는 권위의 과시 등의 용도가 더 일반적이 었다. 철기 시대에 와서야 철기가 농경도구 등 일상용구로 널리 쓰인다.

이 시대는 주로 수렵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얻었다. 과거에는 'Man the hunter(사냥하는 남자)'라는 개념이 강해서 사냥을 하던 남성에 의해 주도된 시대라고 여겼다. 하지만 극지방을 비롯한 예외적인 환경을 제외한다면 수렵-채집 집단의 영양공급에서 채집식량의 비중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수렵-채집사회의 식량자원 획득은 그들이 생활하는 주변 자연환경의 다양성 만큼이나 천차만별로 다양하기에 일반화 하기에 어렵지만, 대체로 사냥, 어획 등을 통해 얻어지는 동물성 영양소와 채집으로 얻어지는 식물성 영양소의 비중은 6:4 ~ 4:6 정도로 평균적으로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명칭도 '수렵사회'나 '채집사회'가 아니라 '수렵-채집 사회'이다.[9] 그리고 이 - 크게 나눠 - 두 가지의 식량 획득방식은 모두 일장일단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식물성 식량자원이 거의 없다시피한 극지방과 같은 예외적인 환경이 아니라면 채집식량은 수렵식량에 비해 훨씬 안정성인 있는 칼로리와 영양소 공급원이다. 만일 늘 어느 정도는 얻을 수 있는 채집식량이 없다면 사냥에 실패하면 굶어 죽어야 할테니 이를 빼놓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면 당연히 식물성 채집식량은 칼로리 밀도가 낮고, 무엇보다 충분한 단백질 공급이 가능하지 않다. 덧붙여, 채집활동을 하는 '채집집단'에게는 식량수집외에도 한 가지 역할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연료"를 획득하는 것이다. (어차피 두 가지가 나오는 장소가 비슷한 곳이다.)

동물성 식량은 칼로리 밀도가 높으며, 동시에 과 같은 식물성 단백질원이나 가축의 을 활용할 수 있는 농경 이후와는 달리, 수렵 채집 사회에서 사냥과 어로 이외의 단백질 획득 방법은 비교적 제한적이다. 따라서 채집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해도 사냥 혹은 어로활동을 통한 식량획득이 없다면, 역시 (열량부족 뿐 아니라 영양소 밸런스 파괴로) 버텨내기 어렵다. 따라서 '누가 일방적으로 주도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냥과 어로 이외의 단백질 획득방법에는[10] 이를테면 곤충 채집이 있는데 실제로 이는 광범위하게 이뤄진 방식이다.[12]] 그리고 이미 죽은 동물의 사체(이를 위해 사체를 찾아다니는 독수리 같은 새들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혹은 다른 맹수들이 사냥한 먹잇감을 빼앗거나 그들이 남긴 것을 가져가 먹는 "스캐빈징"도 있다.

이는 인간의 신체적 강점인 정교한 투척 능력과 손을 쓸 수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장시간을 걷는 데 유리한 것, 털이 없고 피부에 땀을 흘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체온조절이 쉬운 인간의 신체적 특징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능력은 사냥에도 중요한 요소로 활용된다. 특히 이는 인류가 발원한 곳이 아프리카 평원이었음을 고려해보면 생각보다 좀 더 요긴한 특성이다. 인간이 쫓아오면 동물은 당장은 인간보다 훨씬 빨리 도망칠 수 있지만, 인간보다 훨씬 빨리 지쳐서 한숨 돌리려고 하면 계속 인간들이 쫓아오니 계속 도망칠 수밖에 없어 결국 지쳐 탈진하고 인간들의 투척 능력으로 창이나 돌 등을 던져 사냥한다. 또한 인간이 직립 보행을 한다는 것도 의외로 도움이 되는데, 사족 보행을 하는 대부분의 동물들 입장에서 직립 상태의 인간은 꽤 큰 동물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초식동물을 도망치게 할 때뿐만 아니라 육식동물의 먹잇감을 빼앗을 때도 유리하다. 현대에서 마사이족들도 이런 식으로 사자들의 먹잇감을 가로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눈속임이기 때문에 육식동물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가져가서 먹어야 한다. 또한 뼈를 부숴 단백질로 구성된 골수까지 빨아먹었다.[13]

물론 이런 유형의 스캐빈징 활동은 사실 '살아있는 사냥감을 추적하고 잡는다'만 아닐뿐 과정도 결과도 실상 사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렵활동과 많은 유사성을 지닌 활동이다. 즉 사냥 만큼이나 장거리, 장시간의 이동을 요구하고 종종 다른 육식동물과 경쟁하게 될 수도 있는, 사냥 못지 않은 위험부담을 지닌 활동이며 따라서 대체로 남성들이 맞는다. 덧붙여 구석기 시대에 인류의 수렵활동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기술적 발전의 하나는 '의 발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활의 발명으로 인간은 추적하기는 상대적으로 좀 더 쉽지만 개체수는 더 적은 대형동물이 아니라, 주변에 더 많기는 하지만 따라잡기 힘들던 중,소형 동물들 또한 사냥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위험을 덜 감수하면서도 더 안정적인 식량 특히 단백질 공급을 가능케 했다는 것.[14]

또 큰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대체로 남성들의 일이었지만, 수렵과 함께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던 어로활동[15]이나, 작은 동물을 잡는 것 등은 그리 성별을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6] 물론 반대로 (식물성 식량에 대한) 채집활동이 '주로' 여성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지, 남자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또한 없다. 그리고 어로(및 그외 조개류등의 수산물을 획득하는 활동을 포함한)활동을 일상적인 주요 식량공급원으로 삼을 수 있는 환경의 집단이 되면, 식량자원의 구성비는 당연히 수렵, 채집 및 어로가 1:1:1 식이 된다.

또한 잡식성인 인류가 먹었던 원시 곡류나 원시 과일류들이 생태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인구수의 압박이 적은 이 시대 특성상 '야생에서 곡식 수확'으로 식단의 일부를 구성하는 일이 가능했다. 사냥 대상인 동물들의 풍부함도 비슷하게 현대보다 더 유리했다.[17] 따라서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다시 식물이 자라나고 다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겠지만, 그 과정(농경)을 인위적으로 하는 노력을 투여할 필요가 없었고 거기에 전념할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인지 먹을 것이 많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 곳에 정착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농경 시대 이전의 개개인이 농경 이후보다 노동 강도면에서 더 편했다는 여러 이야기도 있다. 어차피 자연 자원의 밀도라는 게 정해진 이상, 인간 집단이 돌아다니면서 채집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다. 따라서 충분히 채집하고 나면 그 이상의 채집 활동은 그냥 헛고생이다. 그래도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헛고생하면서 돌아다니다보면 쓸데없이 영양분을 낭비하고 부상의 위험과 자연의 위협에 마주칠 확률을 늘릴 뿐이니까, 적당히 식량을 모으면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하는 게 좋은 것이다. 구석기 인류의 채집/수렵 활동은 풀밭 산보가 아니다. 헛되이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어차피 남는 시간'에 인류는 - 그냥 퍼져서 쉬기만 한 것이 아니라 - 장신구 제작에서 벽화#s-2.1그리기까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장잉정신(?)을 발휘, 인류의 '정신문화'를 일구게 된다.

지구상 모든 곳이 먹고 살기 편한 곳일 수 없는데, 모든 걸 자연에서 얻어야 하는 석기 시대에 어떻게 채집으로만 먹고 살 수 있었겠느냐[18]'는 의문에 대한 가장 그럴 듯한 답변은, '그럴 수 있는 곳만 찾아 다니며 살았고, 그럴 수 있는 규모의 인구를 유지했다'는 것. 즉 한 지역의 자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지역을 이동하는 생활 패턴과 거의 제로 성장에 가까운 인구 저성장 상태가 유지되어야 가능한 것이었고, 어느 정도는 꽤 오랜 기간 그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

전자 - 이동성의 결과로 결국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아메리카까지 퍼져나간 거고, 후자 - 낮은 인구 성장율의 유지는 높은 영유아 사망률 등 자연적 요인과 더불어 '영유아 살해'를 비롯, 알려진 혹은 - 분명한 의학적 효과는 확인되지 않은 약초 등의 - 알려지지 않은 여러 수단이 동원 되었을 수도 있다.[19][20]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시작되는 인류의 대다수는 이 시기를 거쳤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모두. 그리고 석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현생 인류는 뭔가에 홀린 듯 이동해서[21] 호주, 태평양, 아메리카, 북극 근방까지 이동했다. 가히 대여행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렇게 이동해서 인류는 이미 구석기 시대에 단일종으로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 서식하는 육상동물로 등극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하면...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애초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열대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확산 된 이후에도 '열대동물'의 생물학적 본바탕에는 사실상 아무런 변화도 없다.[22][이를테면 피부색이나 모발 등의 사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몸에 털이 없다시피하고, 전신의 피부에 땀샘이 잔뜩 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체열을 저장하는 것' 보다 '체열을 방출하는 것'에 훨씬 더 특화되어 있는 종이다. 즉 '아프리카의 평원에서 돌아다니는 것'에 최적화되었다고 할만한 종이다. 그런데 이런 생물학적 성격을 그대로 지닌 동물이 빙하기의 유럽과 아시아에 진출하고, 결국은 극지방까지 즉 원래 서식지인 아프리카 평원과 비교하면 기온만 따져 섭씨 60~70도 이상 차이가 나는 환경까지 진출한 것이다. 그것도 구석기 시대의 테크놀러지를 가지고 말이다... [23] 물론 극지방까지 진출한 것 뿐 아니라,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 정착한 현생 인류 집단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민족집단으로서 여겨지는 이들이 바로 바다를 건너가는 것 외에는 도달할 방법이 없는 오스트레일리아에 무려 5만년 전에 정착한 "어보리진"이라는 것도 생각해보면 그 못지 않게 충공깽한 사실일 것이다... 빙하기라 해수면이 낮아진 상태였다고 해도 동남아에서 호주대륙에 도달 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큰 배를 만들고 이주 할 만한 질서와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인류의 '활동지역'을 이보다 더 넓히는 것은 20세기에 이르러 남극에 그리고 우주에 발을 디디면서나 가능했다.[24]

보통 최후의 빙하기 시대가 포함되며, 수렵-채집-어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신석기 초기 - 중기 무렵부터 농경이 시작되니 당연한 이야기.

또한 중기 구석기 시대까지는 대체적으로 동굴에서 살던 것이 후기 구석기 시대에 들어서는 막집('움막 집'이란 뜻이다)을 지어서 살게 되었다. 인구 수가 별로 많지 않았고 자원을 이용하기 쉬웠기 때문에, 오히려 이 바로 다음의 시대보다 전체적인 삶의 질은 높았다. 자원(주로 식량)의 분배 문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서로 다른 부족이나 군락 간에 분쟁과 충돌은 있었을지언정 일정한 생활 공간을 공유하는 하나의 사회 집단 내에서는 아직까지 계급적으로 고착된 분배 불평등이 나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 시기를 '원시 공산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런 점에 주목한 명명이다.

단백질 섭취량과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도 일부 수렵 채집인들은 잘 먹고 잘 산다. 농경의 이점은 삶의 질보다도 부양할 수 있는 인구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유목 민족과 정착 민족의 수만 세어 봐도 농경에는 많은 인구를 지탱할 수 있는 압도적인 생산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바꿔 말한다면 '개개인의 복리'의 차원에서 농경 사회, 특히 초기의 농경사회는 나은 점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지만[25], '집단 대 집단'의 경쟁에선 훨씬 유리했다는 것이다. 결국 농경-정주 집단이 더 좋은 자연환경을 지닌 지역을 차지하고, 수렵채취 집단은 농경이 불가능한 더 열악한 지역으로 계속 밀려나며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현생 인류라 볼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쯤 아프리카에서 등장했으며, 10만 년 이후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빠져나온 시점에서 당시에 생존해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접촉한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는 혼혈이 발생할 수 없을 만큼 유전적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었지만 실제로는 약간의 혼혈이 발생했다는 것이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유전체 분석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아시아와 유럽인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비율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볼 때(2% 내외), 레반트/코카서스 인근에서 막 아프리카를 벗어난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로도 네안데르탈인과의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초기에 아시아로 이동한 멜라네시아/네그리토 사람들은 추가로 아시아 데니소바인과의 혼혈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26] 덧붙여 막연히 현생 인류보다 무식하고 투박할 것으로 인식되어 오던 것과 달리, 석기 제작 기술로 비교할 때 네안데르탈인의 기술이 같은 시기 현생 인류보다 딱히 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네안데르탈인들의 석기를 유적을 바탕으로 실제로 재현서 제작해본 결과, 그 제작에 필요한 기술이 현생 인류의 석기에 비해 낮지도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생 인류의 석기에 비해 더 효율적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의 손 모양을 따져보면 (당연히) 네안데르탈인들에겐 그 쪽이 더 손에 맞는 쓰기 편한 석기였다고. 즉 석기 기술의 수준이 아니라 그걸 쥐고 쓸 손의 차이가 반영되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선 당연히 모양을 잡아 만들어놓은 '완제품' 석기 유물을 -특히 정교한 날붙이를-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지만,[27] 실제로 그 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인들에겐 석기 자체보다 석기를 만들 "몸돌"이 더 중요한 물품이었다고 한다. 돌의 조각을 떼어낸 도구 특히 얇게 떼어낸 날붙이 같은 것이 사실 그렇게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건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따라서 완성품 석기는 기본적으로 몇 번 쓰고 버리게 되는 소모품에 가깝고, 계속 석기로 쓸 조각을 떼어낼 질 좋은 몸돌 쪽이 구석기인들에겐 더 중요한 물건이었고, 구석기인들은 실제로는 아예 몸돌을 갖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석편을 떼어내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따진다면 장신구 같은 것은 동물의 뼈나 조개껍질은 물론 심지어 돌도 갈아서 만들던 구석기인들이 '갈아서 만든 도구'는 쓰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28]

한때 전기 구석기 유물 중 하나인 아슐리안형 석기(석기의 양면에 모두 날이 선 형태가 특징)를 기준으로 문명의 정도를 평가하고, 때문에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되지 않은 채 외날석기만 발굴되던 동아시아를 미개 문명으로 평가하는 고고학자(대표적으로 모비우스(Movius)라는 학자가 있다)들이 있었으나[29] 1977년에 우리나라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 도끼(흔히 양면 핵석기라 부른다)가 발견되었는데 연대 추정 시기에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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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발견자 그렉 보웬. 당시 주한미군이었던 그는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다가 전곡리 석기를 발견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곡리 선사유적지 참고.

참고로 일본에서는 한국만큼 오래된 구석기 유물이 나오질 않아서 관련 학자들은 꽤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만다. 후지무라 신이치 참고.

경기도 고양시수원문산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도 구석기 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

또한 당시 인간의 사냥감과 무리 지어 지구력으로 사냥한다는 점이 늑대와 생태지위가 완전히 겹쳐 엮이는 일이 많았다. 이때 인간들은 늑대들이 경계나 사냥 추적용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길들여 로 가축화했다.즉 개는 인간이 최초로 가축화한 동물이다.

3.1. 중석기 시대

中石器時代, Mesolithic. 중석기 시대를 따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고, 구석기 시대의 일부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홀로세가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이 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작고 날랜 동물들이 많이 나오면서 이에 맞춰 이 개발되었다. 또한 작은 동물 및 물고기를 잡거나(화살, 작살, 작은 투창 등) 해체하기 위하여 조각이 작은 잔석기가 많이 쓰였다.

이는 유럽 및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륙에 따른 구분법으로, 지역에 따라 중석기 시대의 구분이 굉장히 모호한 지역도 있다. 가령 고고학자들은 동아시아에서의 중석기 시대를 기원전 8,000-6,000년대로 추측하지만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초기 농경을 통해 초기 도시 국가가 태동하고 있었다. 예리코 성은 이미 기원전 8천 년대부터 성벽을 쌓았다.[30] 또한 동아시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산물로 여겨지는 토기가 이미 구석기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화살촉과 같은 잔석기 사용이 분명한 흔적은 기원전 10,000년 이전에 이미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5,000년경과 기원전 40,000년경에 인류의 이주가 시작된 아메리카 대륙이나 오세아니아에서도 초창기에는 활을 사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 지역에서는 활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잊혔을 뿐. 여전히 중석기 시대에 대한 구분은 굉장히 모호하며, 보편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연구할 거리가 무궁무진하다고 하겠다.

4. 신석기 시대

新石器時代 / Neolithic

신석기 시대와 구석기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토기의 등장과 간석기(=마제석기)의 사용, 농경과 정착 생활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고 한 가지만 등장해도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약 1만 년 전에 등장한 제주도 고산리식 토기가 신석기 시대의 개막을 알리지만, 이 토기는 제주도에서만 한정되었을 뿐더러 그 후 몇 천 년 동안에 존재한 토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신석기 시대로 편년해야 할지 논란이 되고 있다. 고산리식 토기의 연대가 과연 1만 년 언저리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상태.[31]

이 시대에도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많이 기본으로 하며 생활하였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등에서 당대의 수렵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기초적인 농경이 슬슬 시작되어 , , 수수 등의 잡곡으로 약간의 농경 농업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기초적 농업을 했던 대한민국과 다르게 예외도 있어서 일본의 신석기 시대는 수렵 및 채집 생활이 충분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경우, 아예 농경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

기존에 한국 사학계는 기원전 4000 ~ 3000년경에 농경(신석기 혁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뚜렷한 농경의 흔적을 남긴 유적은 없다시피 해 신석기 시대 농경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강원도 고성에서 기원전 4000년부터 신석기 시대에 이미 밭에서 농작물을 재배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이 발견됐다. 이 발굴 결과 신석기 후기 농경은 실질적으로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체계적인 농경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성인병이 처음으로 발생한 시기라고도 추측되고 있다. 이유는 곡물 재배가 활성화 되면서 탄수화물(섭취 후 당으로 변환되며 지방으로 축적됨) 섭취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 대로 신석기는 구석기와 마찬가지로 수렵과 채집이 기본 생활이었음은 기억해야 한다. 신석기 후기에 들어서도 농경은 조악한 형태와 소규모로 할 수밖에 없었고, 본격적인 농경(벼농사)은 아무래도 철제 농기구 사용과 관개수로 정비에 노동력 동원이 가능한 계급제와 국가 제도가 정비된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 이후의 일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인류는 동굴천막을 버리고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을 짓기 시작하며, 이나 과 같이 본격적으로 돌을 이용한 건축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고고학자들은 신석기 시대의 시작을 대략 기원전 8000~120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초기 신석기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유적으로는 예리코가 있다. 최근에는 괴베클리 테페가 등장하면서 아직 농경 문화에 들어서기 전인 수렵 채집민들도 이미 조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는 각 지역마다 토기를 기준으로 편년이 나뉘지만 크게 3가지로 나누자면, 융기문토기의 전기, 침선문(= 빗살무늬 토기)의 중기, 민무늬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각 시대 토기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나오지는 않고, 토기 내에서도 다양한 구분과 변형이 존재한다. 흔히들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 아는 포탄형의 빗살무늬 토기는 중서부 지역에서 등장하는 토기이다. 그 외의 토기는 대부분 평평한 바닥을 띠고 있다. 세계 각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양식의 토기가 존재하며, 이미 원시적인 형태의 문화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시가 되고 있다.

여담으로 초기형 물레와 베틀은 이 시기에 이미 존재. 즉 이 시기엔 천옷이 존재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석기 시대의 끝 무렵에 인류는 금속을 다루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어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람의 해골을 토대로 얼굴을 복원했더니, 오늘날 웬만한 현대인 저리 가라 할 영화배우급 핸섬함을 자랑하는 결과물이 나와버렸다(...) 덕분에 5,500년 뒤 후손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열등감 제대로 폭발 중. #

놀랍게도 농경이 도입된 이후에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보다 여가 시간과 영양 수준이 오히려 줄었다[32]. 현생 인류의 부계 혈통으로 지목되는 'Y 염색체 아담'을 다뤘던 NGC의 Genographic Project 다큐에서도 소개되듯, (다른 때도 아니고 7만 5천 년 전 토바 화산 분출로 현생 인류가 멸종 위기를 겪은 직후인) 7만 년 전 인간이 살았던 아프리카 동부 해안 유적에서 조개 껍질을 갈아 만든 목걸이 따위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인류의 이른바 정신 문화라는 것이 탄생한 이유는, 바로 썩어나는 시간을 떼우기 위한 잉여질이었을지도. 실제 농업이 시작된 전과 후의 유물의 수준에 차이가 난다. 채집 시절에 근사하게 목걸이도 만들고 절구도 모양 좋게 다듬어서 썼지만, 농사 짓기 시작하면서 바빠서 그런 건 없다가 되어버렸다. # 유골의 경우도 채집 시절에는 영양 상태가 고르고 키도 컸지만, 농경 시대에 들면서 키도 작아지고 관절의 마모도 심해졌다. 그러고도 식량이 모자라 다툼이 잦았는지, 이 시대 농부들의 유골의 상당수에서 전투로 인한 타박상의 흔적도 있다고.
그러나 원시적인 초기의 농경으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고, 특히 일시적인 기상 변동 등 국지적인 자연적 압력에도 취약했던 것은 분명. 여기에 급작스런 인구 밀도 증가와 무엇보다 가축 사육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전염병 등으로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기를 겪기도 하는 등 농경사회의 정착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뤄진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구증가-식량부족-농경-인구증가-식량부족-농경...하는 식으로.

다만 늘어난 노동을 감수할 만한 이득이 있었다. 자연 환경과의 대항에 있어서 사냥/채집 인류는 잘해봤자 먹이 사슬 중에서 상위에 올라가는 수준의 권력을 지닌 것뿐이었다면, 농경 사회로 인한 인구 증가와 사회 체제를 구축하고 나서 비로소 인류는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단계를 넘어 자연과 대립하면서 독립된 인류 집단 내부 환경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 변화나 급작스러운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확률적 안전성, 유전자적 규모를 확보하게 된 것. 다만 기존 이론의 시각에서는 초기 농경사회의 떨어지는 농업 효율과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 강도를 초기 농경인들이 무엇을 믿고 버텼는 가를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최근에 연구되고 있는 괴베클리 테페 유적지의 연구 결과 어쩌면 정반대이고, 그리하여 생긴 집단이 먹고 살기 위해 농업을 했다는 설이 부상하고 있다. 즉, 초기 단계의 농경을 시작한 소수의 신석기인들이 그런 장밋빛 미래를 예상하고 농경 초기의 생활 수준 하락을 버텨내 인구를 증가시킨 게 아니라, 일단 사람이 모여서 인구가 늘어나자 뭐라도 먹고 살려고 하다보니 농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 이러한 것이 맞을 경우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주장한 것 같이 인류의 상호 주관[33]이 인류 발전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예술적 및 필수적 이상의 숙련 기술의 발달은 농경으로 인한 생산량 절대 증가로 인하여 잉여 농산물이 집중되는 지배 체제가 구축되고, 구석기인보다도 더 풍부한 자원과 시간을 활용 가능한 소수층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퇴보한 양을 회복했다. 이러한 초잉여 자원 집중에 의한 경제 활동은 구석기 시대의 수준을 넘어서서 현재까지 계속 발달중이다. 간석기, 청동 사용 기술의 체계화로부터 NASA의 우주 개발에 이르는 활동은 수많은 개개 인류에게서 수집된 세금이라는 집중 자본이 점점 성장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

5.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의 개시는 상당히 이른 편인데, 이는 동아시아의 최초의 토기 제작 시기가 후기 구석기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각지에서 1만 년 전에 토기 제작이 시작되어 중국 하북성 남장두(Nanzhuangtou, 南莊頭), 호남성 옥섬암(Yuchanyan, 玉蟾岩), 강서성 선인동(Xianrendong, 仙人洞) 등에서 초기 토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러시아 아무르 강 유역의 Gromatukha, Gasya, Khummi 유적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초기 토기가 발굴되었다. 한반도의 경우 절대연대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양양 오산리와 제주도 고산리에서 신석기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동아시아 토기 제작 기술의 발명과 토기 사용의 확산은 어느 한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전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별개의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역별 토기의 장식 형태나 토기 모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기가 출현한 지역이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주변 지역에서 모방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초기 토기는 아직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용도별 토기가 등장하지 못했고, 토기를 굽는 온도도 낮아 무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풀이나 동물 털을 섞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농경이 시작되기 전에 토기가 등장하고 있으며, 초기 토기의 용도는 저장용이 아니라 조리용으로 추정된다.

참고 문헌
  • 유태용 (2010) - 고고학적 측면에서 본 한민족의 정체성, 민족학연구, 9, pp83-118.
  • 임상택 (2013) -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토기문화
  • YV Kuzmin (2006) - Chronology of the earliest pottery in East Asia: progress and pitfalls. Antiquity, 80, pp 362-371.

6. 황하 유역의 신석기 문화 전개 양상

자산 문화(Cishan culture, 磁山文化), 배이강 문화(Peiligang culture, 裴李崗文化), 가호 유적(Jiahu site, 賈湖)

배이강 문화는 1977년 하남성 정주시 배이강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대표로 하는 기원전 7천 년경에 시작된 신석기 문화이다. 가여하(賈汝河)에서 복우(伏牛) 산맥 북쪽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초기부터 숫돌을 사용해 석기를 갈아서 다듬는 기술적 진보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토기 제작은 초기에는 모래와 같은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점차 개선되었다. 가마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더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구워내기 시작했고, 용도별로 기종이 분화하기 시작했다. 바닥이 평평한 물항아리, 바닥이 둥근 사발, 입구가 좁은 호리병, 술잔이 대표적인 기종이다. 이와 더불어 토기를 받치는 삼발이 구조나 토기 바닥에 덧댄 지각(支脚)이라 불리는 구조가 배이강 문화의 대표적인 지표이다.

집자리는 땅을 반쯤 파고 만든 움집이었고,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원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돼지 등을 사육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축을 키우는 것보다 수렵이 식량 확보에 더 기여했을 것이다. 십여명 내외의 가족이 3~4집이 모여 씨족을 이루고, 여러 씨족이 모여 하나의 부족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부족을 구성하는 가족 집단이나 부족 집단 사이의 격차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장 방식은 시신을 반듯이 눕힌 형태로 묻은 개인장이다.

자산 문화는 배이강 문화 지역의 북쪽에 존재한 지역 변이 문화로, 하북성의 하북 평야와 태행 산맥 동쪽 지역에 존재했다. 토기를 포함한 물질 문화 양상을 보았을 때 배이강 문화와 강력한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배이강 문화에 속하는 문화로 판단된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토기에 지각이나 삼발이를 사용하는 배이강 문화와 달리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아 맥주컵과 같이 옆면과 아랫면이 평평한 토기가 함께 만들어졌다. 이런 영향력은 다른 황하 지역에서 확인할 수 없는(후리 문화는 예외이다) 옥이 나오거나 도자기 가면이 나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자산 문화는 황하 유역 문화 중에서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곳으로 생각된다. 흥륭와 문화 지역과 함께 최초로 기장 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장과 조는 곧 황하 유역의 주요 농경 작물이 되었다.

7. 보드게임의 한 종류

자세한 내용은 석기시대(보드 게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가호 유적은 배이강 문화 지역의 남쪽에 존재한 유적으로 배이강 문화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유적이다. 기본적으로 배이강 문화에 속하지만 양자강 유역의 물질 문화와 생활 양식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배이강 문화에 속하는 토기 이외에 손잡이용 두 귀가 달리고 토기 아랫부분이 볼록 부풀어 오른 긴 모가지-입구 좁은 병과 같은 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기장과 조를 기른 배이강-자산 문화와 달리 곡물은 쌀에 의존했고, 기장/조는 전혀 재배하지 않았다. 매장 양식 역시 양자강의 영향을 받아 이차장(매장으로 모든 예식이 끝나지 않고 추가로 매장 의식을 더 치르는 행위)이 이루어졌다.

참고 문헌
  • DJ Cohen (2011) - The Beginnings of agriculture in China: A multiregional view, Current Anthropology, 52,pp. 273-293.
  • YV Kuzmin, AJT Jull, and GS Burr (2009) - Major patterns in the neolithic chronology of East Asia: Issues of the origin of pottery, agriculture, and civilization, Radiocarbon, 51, pp891-903.
  • X Liu, HV Hunt, and MK Jones (2015) - River valleys and foothills: changing archaeological perceptions of North China's earliest farms, Antiquity, 83, pp 82-95
  • Z Yanping (2013) - The Early Neolithic in the Central Yellow River Valley, c.7000–4000 bc, A Companion to Chinese Archaeology

7.1. 참고

8. 대중매체에서

시대적으로 원시 시대이거나 금속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원시적인 부족이 주로 석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실제 사용된 석기와는 달리 그냥 나무 손잡이에 돌멩이 매달아 놓은 식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가장 대표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다름 아닌 돌도끼다.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은 일단 배경이 석기 시대. 다만 배경만 석기 시대지 돌 도구나 공룡을 이용해서 현대에 있을 만한 물건은 어지간하면 다 있는 오버 테크놀러지스러운 광경을 보여준다. 스톤펑크 만화 이 작품이 미친 영향은 의외로 커서 후에 석기 시대를 다루는 작품들 상당수가[34]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과 같이 석기 시대이지만 외려 현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작가들이 석기 시대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현대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 다만 도라에몽 극장판노비타의 일본탄생은 웬만한 학습만화 못지않게 석기시대에 대한 고증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초기 캠페인 중에 하나인 다크 선은 환경 파괴로 인해 금속 자체가 씨가 말라 사실상 이 시대에 머물러 있다. 일반적인 무기 중에 가장 쓸 만한 날붙이가 흑요석이고, 그 외에는 뼈 도구 정도나 보이는 수준.

도미네이션즈에서 발전 단계중 하나로 등장한다.

마인크래프트 플레이의 시작과 끝. 돌 곡괭이와 가죽 옷으로 일어나 다이아 곡괭이와 다이아 갑옷으로 귀결된다. 게임 내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으면서 가장 범용성 좋은 재료가 바로 돌인지라 어느 정도 금속을 얻게 된 후에도 돌 도구를 그야말로 징하게 쓰게 된다. 모드를 떡칠해서 온갖 기상천외한 자원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처음 시작하면 돌 도구는 반드시 만들어 쓰게 마련이다.

학원기이야담에서 희대의 개깡패 여주인공인 유소연이 어린시절 홍콩할매귀신에게 산속에서 극한 생존 수련을 받을 때 사용하는 것이 나왔다.

파 크라이 프라이멀은 아예 석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다. 트레일러에서는 기초적인 언어와 함께, 창과 활로 매머드를 잡는 모습이 나왔다.

9. 기타

미 전략 공군의 아버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아주 좋아했던 시대. 자세한 내용은 커티스 르메이 항목 참조.

비슷한 경우로 아인슈타인의 인터뷰 내용이 있다. "장차 어떠한 병기들로 전쟁을 수행할 것 같습니까?"라는 언론의 질문에 "3차 대전에서 쓰일 무기가 어떤 것들인지 모르겠지만 4차 대전에선 돌과 나뭇가지가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유튜브 채널 Primitive Technology는 촬영용 카메라 외에는 어떠한 현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석기와 자연에서 채집한 재료만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므로 알맞는 광석만 찾으면 청동기 시대철기 시대로 옮겨갈 가능성도 있다. 드디어 철을 굽는 데 성공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 '위대한 인류'에서는 출연자들이 최초로 석기를 사용한 호모 하빌리스 시대부터 호모 사피엔스 시절의 상황을 재현했다. 맹수가 남긴 고기 뜯어먹고, 불피우고, 짐승 가죽 벗겨서 외투 만들어 입고 빙하를 건너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한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런던 대학교 그룹, 브라질 상파울루대 등 국제 공동 연구팀이 브라질 세하 다 카피바라 국립공원에 사는 카푸친원숭이(꼬리감는 원숭이)가 구석기인처럼 돌을 깨서 뾰족한 석기(타제석기)를 만드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관련 논문을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Nature)' 최신호에 발표했다고 한다.

현재 파나마의 카푸친 원숭이가 석기 시대로 진입했다고 한다.# 까마귀나 곰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알지만, 이 원숭이의 경우 용도에 따라 석기를 가공하는 비범함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중국의 동물원에서는 파나마 원숭이가 돌을 날카롭게 가공해서 유리를 깨고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을 정도.# 근데 자기도 놀라서 도망간다.

[1] 구석기 시대를 뜻하는 고유 명사와 형용사가 스펠링을 공유하기 때문에 Period/Age/Era 따위의 명사를 뒤에 붙여도 되고 빼도 된다. 다만 생긴 게 생긴 거다보니 형용사처럼 쓰는 편이 일반인들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들리는 편이다. 단독으로 쓸 경우 The Paleolithic이라고 하면 보다 확실한 느낌을 줄 수 있다.[2] 쉽게 말해서 인류가 탄생한 지 24시간이 됐다고 가정하면 약 15분 전까지만 해도 주먹도끼 휘두르는 원시인이었단 거다.[3]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정의는 '걸어다니는 원숭이'가 아니라 '도구를 쓰는 동물'이었다. 당시 수많은 석학들은 해달이 사람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아닌가 돌로 조개를 깨서 먹는데 돌은 도구인가 아닌가 를 진지하게 토론을 했었다. 그때는 동물 행동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이런 분류가 가능했으나, 지금은 수많은 연구로 동물들이 도구를 사용하는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완전히 사라진 분류 방식이다.[4] 과학자들은 이 원숭이들을 200만년 정도 더 관찰하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5] 돌을 서로 후려쳐서 파편이 떼어져 나가서 만들어진 석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먹도끼 같은 걸 보면 어지간한 생명체는 죽일 모양을 하고 있다.[6] 들판의 돌멩이와 달리 뗀석기는 만들 때 어떻게, 왜 만드는지 정하고 깨뜨렸단 뜻이다.[7] 만약 이전에 다른 문헌에서 언급된 바 있으면 수정 바람.[8] 추리 만화에서 트릭으로 쓰일 만큼 요긴한 암석이다.[9] 사실 남아프리카의 코이산족(또는 '쿵족'이라고도 불리는)등 현존하는 수렵 채취 사회 - 사실 정확히는 '수렵 채취 사회에 가까운 사회'에 가깝다. 엄밀하게 따지면 오늘날 100% 수렵 채취에 의존해서 생활하는 집단은 사실상 남아있지 못하다 - 는 대체로 영양구성에서 채집식량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게 실제 농경이전 구석기 시대에도 주된 양상과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확답하기 어렵다. 동시에 다른 연구들은 - 구석기인들의 유골에 대한 분석 등을 바탕으로 - 실제로 구석기 시대 인류는 전반적으로 오늘날 남아있는 수렵채취 집단의 평균적 상태에 비해 더 높은 비중으로 동물성 단백질 식량을 얻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높은 경우엔 60~65% 까지, 낮은 경우엔 50% 내외의 칼로리와 영양소를 동물성 식량에서 얻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물론 오늘날 남아있는 수렵채취 사회와 마찬가지로 4:6~1:2 정도의 비율로 식물성 채집식량의 칼로리 비중이 높았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연구도 있고 말이다.[10] 식물성 식량을 획득하는 활동이 대체로 일정한 것에 비해, 동물성 식량의 획득방식에는 유형이 많은 이유는 당연히 그 주된 방식인 사냥이 더 변수가 많고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보충적인 여러 단백질 획득방식을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11] 인류는 기본적으로 잡식성 동물이고 수렵-채집민은 '야생의 상황'에서 살아가려면 잡식성 동물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12] 그러나 살만 발라낸 것이 아닌 통곤충의 질량 대비 열량 효율은 매우 낮다. 충식 항목에서는 '효율적이다'라고 하지만 이건 투입된 사료 대비 효율이지, 실제로 직접 곤충을 채집해서 먹어야 할 경우에는 사료 효율은 쓸모가 없다. 일종의 단백질 보충용 별식으로는 기능하지만 주식으로 쓰기는 힘들다. 하지만 어쨌거나 먹을만한 곤충이 있는 지역의 수렵 채취민들은 대부분 곤충을 먹는다. 큰 위험부담이나 체력소모 없이 얻을 수 있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을 마다할리가... 그리고 다른 단백질 획득 방법; 즉 수렵이나 어로 등과 비교하면 도리어 '채집활동'에 더 가까운 속성이어서 여성들은 물론 아이들도 (상대적으로) 쉽게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식 개념은 되지 못하더라도 광범하게 행해진다. [11[13] 하이에나 등 치악력이 좋아 뼈째 씹어 먹을 수 있는 동물이 아님에도, 도구와 정교한 손동작을 이용해 뼈를 깨뜨려 골수를 빼먹을 수 있었다는 것도 초기 인류의 생존에 나름 적잖은 공헌을 한 요소라고 말해진다.[14] 심지어 별도의 전문화된 어로 도구 없이 물고기도 활과 화살로 잡는 집단들도 적잖다.[15] 여기엔 당연히 물고기를 잡는 것 뿐 아니라, 조개류 등 수산물을 식량원으로 채취하는 것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양이 많던 적든 먹을만한 조개류가 있는 지역이라면 일단 '도망가지 않고, 종종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잡을 수 있는' 식량을 그냥 놔두는 경우는 없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 약 7만 5천년 전 - 장신구 유물이 나온 남아프리카 해안의 유적에서도 조개를 채취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장신구 자체도 조개껍질로 만든 것이었고 말이다. 때문에 '조개류의 섭취가 두뇌 발달을 가속시켜서 정교한 문화의 발달이 가능했다'는 주장까지 있었다.[16] 또한 극지방의 이누이트처럼 자연환경이 극한적이어 수렵활동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우, 직접 동물을 잡는 것은 남성들의 몫이지만, 사냥이 식량공급의 주 원천이고, 또한 다른 지방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더 장시간의 사냥여행을 요구하는 성격상 사냥과정 전체는 사실상 남녀를 아우르는 공동체 전체의 일거리에 속하며, 여성들도 사냥그룹에 동행, 사냥도구와 의복 수선 등의 '야전지원업무'를 분담한다. 말하자면 메딕.[17] 근대까지 지역에 따라서는 수렵 채집으로만 생활했던 북미 원주민 생활권에서도, 빙하기 인류 유입 이래 지속적인 사냥으로 인해 신생대 거대 포유류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수렵 채집 상태의 인류만으로도 생태계에 지속적으로 변화를 가할 수 있는 강력한 최상위 교란자라는 증거가 된다.[18] 그런 연구 내용 중 일부에 따르면 (흔히 부시맨이라 불리던)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의 경우 주당 20시간의 노동 시간으로 하루 평균 2,300칼로리 정도를 섭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19] 원시 사회에서 영유아 살해의 대상은 남아보다 여아가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여아를 줄이는 것이 인구 조절에 더 확실한 수단이므로. 그리고 남아는 굳이 영아 때 죽이지 않아도 사냥을 하면서 어차피 소모되니까.[20] '!쿵'족에 대한 인류학 연구 - 대표적으로 마저리 쇼스탁의 '니사'- 에서는 이들이 전통적으로 식물에서 채취된 일종의 낙태약을 사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국내의 '아마존의 눈물'에도 소개되었던 아마조니아 '조에족'을 다룬 해외 다큐에서도 조에족이 나무 껍질 등을 피임약 혹은 낙태약 비슷하게 사용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이상의 정확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인류가 동식물에서 구해지는 화학 물질을 치료제나 독극물, 나아가 환각제까지 여러 용도로 사용해온 것 역시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식물 중에는 포유 동물의 에스트로겐이나 프로게스테론처럼 작용하는 물질을 포함, 동물에게 작용하는 유사호르몬 성분을 지닌 녀석도 꽤 있다. 이는 사실은 일부 식물이 살충 성분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의 방어 전략의 하나다. 즉 '포식자'인 대형 초식 동물 - 그런데 그게 주로 포유류다... - 에게 '피임약'을 먹여 번식율을 떨어뜨리는 전략. 때문에 한 지역에서 오래 돌아다닌 집단이 뭔가 약발이 듣는 걸 발견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21] 애초에 채집과 동굴 생활이라 해당 근거지의 자원을 전부 소모하면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체로는 다른 동물이 그렇고, 아직 수렵 - 채집 사회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소수 부족들처럼 일상적으로는 '계절적 이동'을 하며 생활했을 것. 하지만 거주 지역의 기후나 식생 등의 변화가 발생했을 때 이동하는 범위에서 인류는 다른 종에 비해 확연히 넓었고, 또 다양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 지질학적, 혹은 생물학적 시간으로 따지면 유례없이 짧은 시간 동안 전 세계로 퍼졌다.[22] 애초 인류의 빠른 확산 속도 덕분에, 그럴만큼의 시간도 없었고 게다가 현생인류는 처음부터 유전자풀이 매우 좁은 종이었다.[23] 그리고 비로서 20세기에 이르러 석기시대 인류의 발길이 닫지 않은 마지막 대륙인 남극 탐험을 성공시킨 로알 아문센도 이누이트의 방한복과 페미컨 등 극지 원주민의 기술을 적극 사용하여 남극 탐험을 성공시켰다.[24] 하지만 구석기 시대 인류의 이동과 확산이 '예외적인 소수가 잠깐 갔다 온 것'이 아니라 하나 이상의 집단이 이주해서 완전히 다른 환경에 정착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달 착륙 정도가 아니라 화성에 '콜로니'를 만들고 정착하는 정도는 되어야 비로서 그 이상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25] 사실 농업의 발생 이후로도 몇 차례의 '농업혁명'을 더 거치고 나서야 비로서 수렵채취 사회 이상의 1인당 영양공급이 가능했다. 박하게 평가하는 경우엔 거의 근세~근대에나 가능해졌고까지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평균적인 수준이 아니라 농경 이후의 사회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평민층 및 하층계급'의 상태를 기준으로 따지면 그보다도 더 박하게 평가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26] K Prufer et al. (2014) - The complete genome sequence of a Neanderthal from the Altai mountains, Nature 505, pp43-49.[27] '석기 제작의 흔적'이 발견되어도 완성품이 있어야 어떤 것을 만들고 썼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니[28] 물론 그렇다고 구석기 시대 인류가 '실용품' 부분에는 '장잉정신'을 전혀 발휘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대표적인 물건이 바로 '돌화살촉'. Mythbusters에도 나온 것이지만, 돌화살촉을 단 화살과 그냥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불로 구워 단단하게 만든 훨씬 간단한 화살을 비교해봤더니 사냥에 필요한 실제 성능에선 거의 아무 차이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내린 결론은 '돌화살촉은 실제로 더 성능이 좋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과시용 물품에 해당할지도 모른다'였다. 물론 위에서도 등장했듯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 말 ~ 신석기 시대 초의 '정착 채집사회'에선 절구 같은 실용품도 돌을 갈아 정성들여 만들었던 경우도 있다. '내구성 소비재'라면 공을 들여 만들기도 했던 듯...[29] 사실 모비우스 라인(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고 되지 않는 지역을 나누는 가상의 선)의 의의는 미개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이동에 대한 가설을 제시하는 것에 있다. 한동안은 인도 동부에서부터 이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지 않는단 점을 들어 인류의 동아시아 진출이 (이 석기를 지니고 들어간) 유럽보다 빨리 이뤄지지 않았나 추정했다. 물론 이 석기에 맞는 재료의 부족이나 유행 때문에 바꿨을 수 있다.[30] 하지만 아직 문명 단계가 아닌 초기 신석기 문화 단계였다. 구리는 기원전 4천 년대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수메르 문명의 시작은 청동기의 도래와 함께 한다 보기에 기원전 3500년대 정도로 추정 중이다.[31] 해수면 상승으로 한반도 초기 신석기 유적이 수몰되었을 수도 있으나, 중국에서는 후기 구석기 토기가 발굴되고 있는 상황이라 그냥 다 없어졌다라고 하기는 조금 어색한 상황.[32] 여담으로 이보다 더한 일이 산업 사회에서 일어났다. 할 수만 있다면 24시간 일을 시켜도 생산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으므로 노동 시간을 한없이 올릴 수 있다. 실제로 바로 그런 이유로 증기기관이 발명되자마자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과 강도가 미친 듯이 높아진다.[33] 상상력, 창의력 등에 의해 초월자, 율법, 이념, 평등 같은 실체가 없는 것을 집단적으로 믿는 능력.[34] 물론 학습만화는 논외. 애초에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작품이니 왜곡을 할 수 없다. 다만 석기시대에 대한 것이 주 내용이 아니라 배경 소재이기만 할 경우 이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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